어릴적엔 주말이면 잠실에 있는 외가집에 종종 놀러가곤 했다.
삼촌들은 가끔씩 나를 롯데 호텔에 있는 목욕탕엘 데려갔었는데,
어느 날은 큰 삼촌이 목욕탕이 아닌 야구장이라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.
십여년이 지난 뒤에 그 날이 언젠지 찾아봤더니 1990년 4월 8일이었다.
그 날은 1990년 프로야구 개막날이자, LG가 MBC 청룡이라는 팀을 인수하여 LG트윈스라는 이름으로
첫 경기를 치른 나름 역사적인 날이다.
경기 전에 선수들이 던져주는 공을 삼촌이 육중한 몸으로 점프하여 잡아주었고,
처음 야구장을 찾은 조카에게 선물로 주었다.
나와 잠실 야구장, 나와 LG 트윈스의 인연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.
LG는 90년, 94년 우승을 통해, 그 동안 지방을 연고로 한 팀들, 특히 해태 타이거즈의 독주를
몇 년째 봐오던 서울 팬들의 우승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며, 수 많은 팬을 확보하게 되었고,
90년대 내 또래의 서울 애들은 90%가 LG 팬일 정도였다.
그만큼 강렬했다.
회원증에 내 이름도 새겨져 있다.
특히 가장 재미있었던 매치는
80년대부터 전국구 강팀으로 자리매김한 전통의 해태 타이거즈와
90년에 나타나 젊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가진 LG 트윈스의 라이벌 매치였다.
두 팀은 확연히 구별되는 팀컬러와 스타 플레이어, 신흥 강호 대결이라는 여러가지 흥미거리를 가지고 있었고,
특히 잠실에서 열리는 LG vs 해태의 경기는 진짜 전쟁 같았다.
지금의 밝고 경쾌한 야구장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던 그 당시의 살벌하면서도 적절히 유쾌했던 야구장이 그립다.
쨌든 이렇게 나는 LG의 노예가 되었고, 잘나가던 90년대와는 달리 지난 10년간 하위권을 맴돌며
조롱거리가 되어가는 내 팀을 응원하기 위해 계속해서 야구장을 찾는다.
야구는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했다.
기다리면 어느덧 때가 온다. 그 때까지 응원하며 기다리는게 팬의 도리이다.
엘지팬 22년에 인격이 완성되었다!
그지같던 매점 하나가 전부였던 야구장에 이젠 수 많은 먹거리가 생겼고, 이 날은 바베큐 치킨와 소세지를 샀다.
야구하기 좋은 날씨다.
LG의 프렌차이즈인 박용택과 이병규가 프린팅 된 티켓
왜 항상 경기 시작 전에 국민의례를 하는지 모르겠다.
일용할 양식
'정의란 무엇인가'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가 시구를 하였다.
노예들.
예전엔 가족단위 + 술취한 아저씨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여자도 많고, 커플도 많고, 바람직한 공간이 되었다.
이 날 경기는 연장 12회까지 가는 병신력 대결 끝에 7:7로 비겼다.
1:7로 지고 있다가 끝까지 쫓아가더니 결국 지진 않았다.
야구장 맞은편에 있는 올림픽 주경기장
집에서 썩고 있는 내 글러브에 쓰여진 정직한 내 이름